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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메소포타미아의 시각적 증명

by hu-il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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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 문화의 발달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타난 두 가지 부산물은 재산 소유권과 직업의 전문화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시각적 증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가축에는 낙인을 찍고 소유물에는 표식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재산의 소유권 형성을 확립하고, 도기류나 기타 물건들의 경우는 품질에 문제가 생기거나 반대로 품질이 뛰어나 같은 물건을 또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문건을 만든 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상거래 문서나 계약서 따위의 내용을 확인해 주거나 사원이나 왕실의 포고령 등의 권위를 입증해 주는 진흑 설형문자판의 글쓴이를 증명할 방법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원통형 인장을 위조 방지 수단으로 사용하고 문서를 봉인하고 그 진위를 입증하였다. 3000년도 넘도록 사용되면서 이 작은 인장들의 표면에는 이미지와 문자들이 새겨지게 되었다. 이 원통형 인장을 젖은 진흙판 위에 놓고 굴리면 인장 표면의 음각 디자인의 도드라진 흔적이 진흙 표면에 생겼고 이것이 곧 소유자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하였다. 원통형 돌의 주위를 돌아가며 음각으로 깎아 넣은 이미지가 진흙판 위에 도드라진 디자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복제하거나 모조품을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 같은 돌 인장들에는 끈을 꿰어 목이나 손목에 차고 다닐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로니아인들은 저마다 원통형 인장을 팔찌처럼 손목에 차고 다닌다고 쓴 바 있다. 장신구로써 신분의 상징으로서 또 자신을 나타내는 고유의 서멍으로서 귀중히 여겨졌던 원통형 인장은 집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 침입자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문에다 젖은 진흙으로 봉인을 하는데 까지 쓰였다. 원통의 문양과 인장을 새겼던 이들은 뛰어난 기술과 세련된 디자인 감각을 발전시켰다. 초기의 인장들은 단순한 그림으로 왕이나, 선으로 그린 가축 내지는 신화 속의 동물을 나타낸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점차 이야기가 담긴 이미지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한 신이 한 인간을 다른 신에게 배알 시킨다거나, 전투나 야생 동물을 죽이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두드러진 모습으로 그려진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그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무대로 한 후기 앗시리아 시대에는 보다 양식화되고 문장화된 디자인 기법이 발전되었다. 신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지고 싸우고 있는 동물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마지막 황금기는 네부차드차르왕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바빌론 시에서 꽃을 피웠다. 하지만 기원전 538년 그 인구가 약 100만 명에 이르고 바빌론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도록 했던 위대한 통치자가 죽은 지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바빌론과 메소포나미아는 페르시아인들의 손에 함락되고 만다. 이 지역은 페르시아의 한 지방으로 복속되었고 그 후에는 계속 그리스와 로마의 속지로 머물렀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급속히 쇠락해 가기 시작했다. 예수가 태어날 즈음에 이르러 바빌론 등 의 거대 도시들은 황폐화되었고 지구라트 사원들도 폐허로 변해 버렸다. 시각 언어의 서광으로서 인류의 앞날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인 문자는 이제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집트인들은 그림문자에 기초하여 복잡한 문자를 만들었으며 페니키아인들은 매우 복잡했던 설형문자 대신 간단한 표음 기호들을 고안하였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기원전 3100년경에 메네스왕이 이집트 땅을 통일하고 제 1왕조 시대를 열었을 당시에 이르면 원통형 인장, 건축용 벽돌 사용법, 다양한 장식 디자인, 문자의 원리 등 수메르인들로부터 나온 여러 가지 발명품들이 이집트에도 전파되게 된다. 그림문자를 추상적인 설형문자로 발전시켰던 수메르인들과는 달리,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라고 불리는 그림과 문자로 된 체계를 거의 3500년 동안이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는 기원전 3100년경에 쓰인 것이며, 또 가장 나중의 것으로 알려진 상형문자 비문은 이미 이집트가 로마의 식민지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인 394년에 새견진 것이다.

거의 15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그 뜻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경탄의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이 언어 체계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이들은 4세기 이집트 사원은 신관들이었는데, 이들이 그 의미를 굳게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당시의 그리스나 로마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성스러운 제의를 위한 주술적 기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1799년 8월 나폴레옹의 군대가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던 로제타라는 이집트 마을에 요새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다. 여기서 비문이 새겨진 검은 석판 하나가 발굴되었는데 이 비문은 두 가지 언어와 세 가지 문자, 즉 이집트 상형문자와 이집트 민용 서체 그리고 그리스 어로 되어 있었다. 이 비문은 기원전 197년 내지 196년 파라오 프톨레미 5세의 예정보다 9년 빠른 왕위 등극을 칭송하는 신관들의 대규모 회의가 끝나고 작성된 것이었다. 세 가지 언어로 쓰인 비문의 내용들이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비문의 내용을 해독해 내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1819년 비문의 상형문자는 동물과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쪽부터 읽어 나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비문 내용 가운데 프톨레미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를 에워싼 카투쉬가 여러 번 나온다는 점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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